[2008 겨울 희망편지] [9] 빨간 내복 입어보는 게 소원이었다
방학땐 장사, 식모살이… 가난해도 포기해선 안돼

이해득·KT 광화문지사 근무

수원에 살던 우리 집은 굉장히 가난했다. 남편 없이 꾸려나가는 살림으로 딸을 중학교 보낼 여력이 없던 엄마는 "공장에나 들어가서 엄마 좀 도와 달라"고 했다. 침울해하는 나를 두고 고민하던 엄마는 며칠 뒤 단추 3개가 다 짝짝이인 낡은 교복을 얻어 왔다. 어떻게 해서라도 중학교까지는 보내야겠다고 결심하신 것이다.

겨울방학 동안 나는 시장 골목 한 처마 밑에 사과궤짝을 갖다 놓고 '뽑기' 장사를 했다. 너무 추웠다. 빨간 내복 하나 입어보는 게 소원이었다. 그렇게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합격했다. 어렵게 마련한 등록금으로 공부를 했고, 방학이면 또 일을 했다. 1학년 겨울방학 때는 서울로 올라와 오빠가 근무하는 직장에서 식모살이를 했다. 옥상 물탱크 한구석에 석유풍로를 놓고 밥을 했다. 컴컴한 새벽도, 30와트짜리 백열등도, 물탱크를 통해 울리는 내 목소리도 무서웠다. 새벽밥 하기가 끔찍이 싫었지만 등록금이 나온다는 희망으로 버텼다. 설날 같은 명절에는 방앗간 앞에 후추기계를 놓고 가래떡 손님들에게 후추를 갈아 팔았다. 다른 데보다 한번 더 곱게 갈아놓으니 손님이 많아 그 돈으로 엄마와 동생들 내복, 운동화를 사기도 했다.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, 난 다른 애들보다 왠지 어른스러웠고 침착하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. 말하자면 애늙은이였던 것이다.

대학교까지 갈 돈은 없었다. 대신 나는 속기학원에 등록해 죽기살기로 공부했다. 1년 뒤 나는 '1급 속기사 전국 1등'이라는 영광을 안고 서울시 공무원이 되었다. 4년 뒤엔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에 특채가 됐고 나를 죽도록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아들 둘도 낳아 재미나게 살았다.

올림픽이 끝난 후 KT로 직장을 옮겼는데, 10년 뒤 IMF가 터지면서 남편 사업이 망했다. 집은 경매를 당했고 내 월급도 차압당했다. 순식간에 인생 밑바닥에 떨어졌다. 하지만 늘 그러했듯,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. 어떻게 살아온 인생인데.

조금씩 빚을 갚아가며 작심을 하고 영업사원을 지원했다. 어려움이 자랑은 아니지만, 굳이 숨길 일도 아니기에 구질구질한 내 인생을 재미나게 풀어놓으면 너나 없이 모두 귀를 기울였다. 영업 현장에서도 내 인생 이야기가 먹혀들었다. 내 손을 잡고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. 그 결과 1999년과 2000년 2년 연속 판매왕에 뽑혔고, 2000년에는 통화 선불카드를 자그마치 428억원어치나 판매했다. 사내 연수원에서도 영업 성공 사례 강의를 하게 됐다. 서글픈 내 이야기가 남들에겐 희망을 주는 스토리로 변신한 것이다.

돌이켜보면 마흔 일곱 해 내 인생은 가난과 한숨으로 가득했다. 하지만 나는 그 가난과 한숨을 언제나 희망으로 덮고 일어섰다. 지겹도록 나를 따라다녔던 가난과 불행이 지금 나에겐 인생의 밑천이요 희망이다. 지금도 나는 쉼 없이 달린다. 법정스님 말씀처럼, 내 영혼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가끔씩 뒤를 돌아보면서….


입력 : 2008.12.24 02:56